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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가문비 나무 2

  가문비나무의 노래에서 조율된 악기 부분이다. 삭개오의 이야기에서 메시아를 통해 조율된 사람을 본다. 예수와 함께 식사한 시간은 삭개오 인생의 카이로스였다. 삭개오는 카이로스를 경험하고 새로운 울림을 찾는다. 내가 가진 것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으며, 누군가를 속이면 4배로 갚겠다. 조율을 통해 우리는 신이 창조한 세계에 선물이 된다. 전능한 신에게 이것저것을 해 달라고 할 것이 아니라, 나의 불신앙을 흔들어 달라고, 나의 게으름과 비겁함, 성장하지 못하고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 신적인 행동과 인간적인 행동을 편협하게 기르면서 소명을 마다하는 그 모든 것을 흔들어 무너져 내리게 해달라고 부탁해야 한다.

   정련 부분이다. 장자는 외적인 것에 비중을 두는 사람은 내적으로 무력해 질 것이다.라고 했다. 노자는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딱딱한 것을 이긴다고 말했다. 예수는 인간으로 온 부드럽고 겸손한 하나님이다. 부드러운 힘이 우리 마음과 행동을 바꾼다. 내가 어떤 일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 안에서 무엇인가가 깨지기 때문이다. 햇빛을 향해 나오는 부드러운 식물이 아스팔트를 깨듯이,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이 우리 안에서 깨지고 하나님 사랑이라는 부드러운 식물이 빛을 향해 길을 낸다. 우리는 자기 울타리를 넘어 사랑하도록 부름 받았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애쓸 때, 우리 삶은 자기를 넘어서게 된다.

   사랑의 줄에 매여에서. 신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것도 마음대로 하지 않는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다른 세계로 옮겨 가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를 받아들일 때, 하나님도 우리와 함께 다른 세계로 옮겨 온다. 믿음은 하나님을 우리 안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머물 때, 우리는 스스로 자기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내 안에 하나님이 계셔! 하면서 말이다. 높아진 마음에는 하나님이 올 수 없다. 예수가 이 세상에 머물 방이 없었듯이, 자랑과 두려움이 자리 잡은 곳에는 거룩함이 머물 자리가 없다. 하나님이 머무는 성전이 되기 위해, 우리는 마음을 낮추어야 한다.

   샤콘. 바흐의 샤콘에서는 사무치는 고통이 느껴진다. 바흐는 제후와 함께 여행을 떠났다. 당시 아내는 건강했다. 바흐가 아무것도 모르고 돌아왔을 때, 아내는 세상을 떠나 이미 장례를 지낸 뒤였다. 이런 예기치 않은 이별 앞에서 바흐는 샤콘을 작곡했다. 샤콘은 바일올린의 절망적인 저항으로 시작해 계속해서 질문과 절망을 거듭한다. 자신을 벗어날 수 없는 듯, 길 잃은 음의 패시지가 이어진다. 이런 음은 점차 따뜻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풍성한 화음에 에워싸인다. 샤콘에서는 한 사람의 세계에 어떤 따뜻한 존재가 발을 들여 놓은 듯, 눈물을 말려주는 무엇인가가 울린다. 하나님을 닮고 싶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의 고통에 참여해야 한다.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지만 스스로 제한하고 기꺼이 방해 받는다. 우리의 시간으로 들어오지만 우리를 둘러싼 조건들을 뛰어넘지 않는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내주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종교개혁자 루터는 모든 노력이 슬데 없는 것처럼 기도하라 모든 기도가 무용지물인 것처럼 일하라 고 말했다. 이는 건강한 모순이다. 하나님과 인간이 떼려야 뗄 수 없는 상호작용가운데 있음을 아는 사람만이 권할 수 있는 말이다.

   창조적인 불안. 믿음은 우리에게 확신으로 작용해야 한다. 그러나 때로는 불안으로 작용해야 한다. 이느 창조적인 불안이다. 고루함과 편협함과 우매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에겐 불안이 필요하다. 의심이 복이 되는 까닭은 우리에게 초심자의 마음을 주기 때문이다. 의심을 통해 다시금 배우는 자가 되어 출발한 장소로 돌아간다. 믿음은 내면의 교사처럼 우리 삶에 감탄과 놀라움을 준다. 형식적인 것들에 얽매이면 교리나 계명이나 규범이 하나님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의심은 하나님이 보낸 사자일 수 있다. 의심은 생각이나 감정으로 극복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의심은 소명을 받아들이고 봉사하는 삶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

   은혜의 선물. 영혼을 어루만지는 악기들이 있다. 스트라디바리우스는 은혜의 선물이다. 스트라디바리우스와는 싸우면 안된다. 싸우면 거칠고 나쁜 소리가 난다. 언제나 악기와 하나가 되어 음을 하나하나 얻어 나가야 한다. 성서가 악보라면 그 속에 담긴 구절들은 오선지 위의 선율이다. 이런 구절은 자신을 읽고 연주해 줄 악기를 찾는다. 우리가 악기가 되어 그 선율을 연주할 때, 이는 우리가 은혜로운 구절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 구절들이 우리를 읽는 것이다.

   역설 속의 진리. 부버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을 관념으로 만드는 것이다. 관념은 기껏해야 사랑받을 수 있을 뿐, 스스로는 사랑할 수 없다. 고 했다. 인격적인 하나님은 우리와 관계 맺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듣고 있기에 우리가 기도를 올릴 수 있다. 하나님이 행동하기에 우리가 그것을 경험할 수 있다. 하나님이 사랑하기에 우리가 응답할 수 있고, 하나님이 말하기에 우리가 들을 수 있다.

   고통속의 한 가운데. 몸의 고통이 우리 몸 어딘가 어떻게 아프고 무엇을 주의해야 하는지 알려 주듯이 믿음의 고통은 우리 삶에 무엇인가 잘못된 부분이 있음을 알려주는 암시인지 모른다. 누구도 믿음을 재산처럼 소유할 수 없다. 믿음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순간에만 얻을 수 있다. 의심이 삶을 무겁게 짓누르고 걱정과 고통과 두려움과 경악이 삶에 드리울 때야말로 믿음이 필요하다. 바로 그럴 때, 우리는 믿음을 배울 수 있다.

   하늘과의 상호작용. 우리가 구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알아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을 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야고보 사도는 너희가 구하지 않기 때문에 받지 못한다.” 라고 말했다. 스스로 겸손하고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어떤 사람이 늙은 수도자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하나님께 뭔가를 구할 필요가 없어요. 사람은 자족할 줄 알아야 해요.” 그러자 수도자가 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나도 그리 생각해 하나님께 아무 것도 구하지 않았어요. 그랬더니 하나님은 큰 은혜를 베풀어 내게 아무 것도 주지 않으셨어요.” 기도는 솔직하게 자신의 곤궁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기를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통해 효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기도한다.

   치유에 이르는 자기 망각. 거룩하고 가치 있는 삶은 덕을 쌓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려와야만 가능하다. 자기가 쌓은 덕을 통해 온전한 인간이 되겠다고, 하나님도 인정할 수 있는 인간이 되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마치 돼지 저금통을 깨서 세상을 몽땅 사 버리겠다고 말하는 어린 소년과 같다. 은혜를 믿기만 하면 모든 일이 손바닥 뒤집듯 쉽게 풀리리라 생각하는 것은 은혜를 믿는 것이 아니라, 마법을 믿는 것이다. 은혜는 우리가 믿음과 소망과 사랑 가운데서 훈련하고 연습할 때 비로소 효력을 발휘한다. 믿음으로 단번에 어떻게 될 것처럼, 단박에 모든 것이 해결될 것처럼 요란 떨기는 쉽다. 변화는 한 걸음씩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으면서 은혜를 들먹이면 안된다. 깨달음을 가슴에 새기고 삶을 바꾸는 사람만이 은혜를 이야기 할 수 있다.

   참회의 장소. 바빌로니아의 탈무드에 참회하는 자가 선 자리에는 완전한 의인도 감히 설 수 없다.” 는 말이 있다. 이것은 깨닫고 돌이키는 자리야말로 인간이 나아갈 수 있는 가장 거룩한 장소라는 뜻이다. 회개의 장소는 감정이 앞서는 곳이 아니라, 명백하게 돌이키는 장소이다. 탕자가 재산을 다 탕진하고 돌아왔을 때에도 아버지는 변치 않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아들이 아직 멀리 있는데도 한눈에 알아보고 달려와 목을 껴안고 입맞춤했다. 농부는 밭에서 잡초를 베버리지 않고 아버지는 타락의 길로 가는 아들을 쫓아가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랑받는 사람을 억지로 복종시키지 않는다. 끊임없이 자기의 강함과 약함을 계산하고 진단하는 사람은 자신을 망각하지 못한다. 내가 얼마나 강한가, 혹은 약한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내가 은혜의 도구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소망. 세 사람이 건축공사 현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첫 번째 일꾼은 의욕이 없고 피곤해 보였다. 지나가는 사람이 그에게 지금 뭘 하고 있어요?” 하고 물었다. 그는 보면 몰라요? 구덩이를 파고 있잖아요.” 라고 대답했다. 두 번째 일꾼은 첫 번 째 일꾼보다 기분이 나아 보였다. 같은 물음에 그는 우린 높은 벽의 기초를 놓고 있지요.”라고 대답을 했다. 세 번째 사람은 기쁨과 생동감으로 충만했다. 무얼 하고 있느냐의 물음에 그는 우린 지금 멋진 교회를 짓고 있어요.” 라고 대답했다. 힘은 물체를 움직일 수 있다. 그런데 힘을 줘도 물체가 움직이지 않을 때, 힘은 그 물체를 구부리거나 부러뜨리기도 한다. 하나님은 움직이지 않는 사람을 그대로 둔다. 억지로 움직이려다가 하나님의 힘이 그를 구부리거나 부러뜨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깨달은 것을 행하고, 명령받은 것을 연습하여 우리를 움직이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힘을 받아들일 수 있다. 소명은 우리의 삶 자체이다. 우리를 방해하고, 우리에게 닥치고, 요구하는 일들을 통해 배우는 것이다. 예기치 못한 일들이 닥쳐 올 때, 우리는 믿음의 날개를 펼쳐야 한다.

   교향곡. 심포니는 전 오케스트라가 함께 연주하는 다악장 형식의 곡을 말한다. 심포니라는 개념은 심포니아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심포니아는 함께 어우러지는 울림이라는 뜻이다. 마태복음에는 너희 중 둘이 하나가 되어 무엇인가를 구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너희에게 주신다고 하신다. 하나님 나라는 이와 같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나 다른 공동체와 어우러져 하나 된 소리를 내는 협주곡, 그것이 하나님 나라이다.

   신학자와 예술가. 16세기 신학자 루터는 모든 인간은 신학자다.”라고 했고, 20세기 예술가 보이스는 모든 인간은 예술가다.” 라고 했다. 그 의미는 모든 인간은 자기 삶을 해석하고 형상화해 나갈 과제를 받았다.’ 는 의미일 것이다. 삶의 원칙을 존중하는 사람은 임의로 행동하지 않는다. 원칙을 존중하는 마음가짐은 자기 형편이 어떠하든지 핑계 대지 않겠다는 용기와 일맥상통한다. 인간은 고독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고독을 견디며, 무엇을 믿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어야 한다. 하나님 안에서 충만한 고독을 경험하는 사람에게는 자기 것을 공동체에 내줄 힘이 생긴다.

   삶의 원칙. 깨달은 것을 실천하는 데는 순종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깨달음을 행하기 시작하면 더 많은 깨달음이 올 것이다. 유대의 랍비 힐렐은 행동보다 지혜가 많은 사람은 가지 많고 뿌리 얕은 나무 같아서 바람이 불면 뿌리가 뽑혀 쓰러지고 만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거룩한 삶의 원칙을 만들어야 한다.

   삶에 제동걸기. 주황색을 칠할 때, 적당한 보색으로 힘을 뺄 필요가 있다. 그래서 엷은 파란색을 입힌다. 엷은 파란색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보색을 만난 살짝 힘이 빠진 주황색은 놀라운 부드러움과 깊이를 지니게 된다. 사람의 생각에도 보색이 필요하다. 자기 생각에 보완적인 생각을 구하면 부드럽고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 스스로 제동 걸 줄 아는 사람은 스스로 강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