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교수의 마지막 강의 <담론>을 읽다. 책 분량이 요약하기 쉽지 않다. 다만 책 속에 이야기로 등장하는 인물들을 소개하면 어떨까 싶다.
사실과 진실에서. 70이 넘는 노인이 있다. 전과가 기억하지 못할 정도라고 한다. 감방에서 대접도 못 받고 한쪽 구석에서 조그맣게 살고 있는 노인이다. 신입자가 입소할 때면 이 순간이 노인이 나서는 순간이다. “어이 젊은이” 다정한 목소리는 아니지만 신입자는 그 소리가 매우 반갑다.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형은 몇 년 받았고 만기는 언제냐는 등 정말 눈물 나는 이야기이다. “일루와 봐” 하고는 노인은 옆으로 불러 앉히고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내가 말이야.” 시작되는 긴 인생사를 이야기한다. 신입자가 들어오자마자 시작하는 이유가 있다. 20-30일이 지나서 이 노인이 감방에서 별 끗발이 없다는 걸 알고 나면 일정 때부터 시작되는 그 긴 이야기를 끝까지 들을 사람은 없다. 첫 날 저녁에 바로 시작해야 꼼짝없이 끝까지 듣는다. 그 노인과 3-4년을 함께 살고 있는 우리도 신입자가 들어올 때마다 그 이야기를 또 듣는다. 비가 부슬부슬 오는 늦가을, 하염없이 철장 밖을 내다보고 있는 그 노인의 뒷모습을 우연히 목격한다. 저 분이 늘 이야기를 하던 자기의 그 일생을 지금 회상하고 있는 건 아닐까? 만약 저분이 다시 인생을 시작한다면 최소한 각색해서 들려주던 삶을 살려고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자를 사실이라고 하고 후자를 진실이라고 하면 어느 것이 저 노인의 삶일까?
한발 걸음. 장난삼아 한 발과 두 발 경주를 했다. 방에서 가장 젊고 빠른 친구와 가장 연로하고 쇠약한 노인의 경주였다. 젊은이는 한발로 뛰고 노인은 두 발로 뛰는 제법 공평한 달리기 경주이다. 결과는 예상을 뒤 엎고 두 발의 월등한 승리였다. 감옥 속의 독서가 바로 한발 걸음이다. 젊은이가 만약 목발을 짚고 달렸다면 이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실천이 부재한 감옥생황에서 독서만으로 자기 생각을 키워 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 후부터 다른 사람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부지런히 들었다. 다른 사람들의 살아온 이야기는 그 사람이 실제로 겪은 과거의 실천이다. 그것을 나의 목발로 삼아 걸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인목수이야기이다. 성함이 문도득이다. 길 道(도)자, 얻을 得(득)자. 이름 때문에 도둑이 되었다고 불평했다. 도득이란 이름은 대단히 철학적이다. 언젠가 부소장이 주문한 뒤주를 목 공장에서 만들 때였다. 부소장주문이어서 목 공장 최고 기술자를 붙였다. 문도득 노인은 당연히 제외, 나이도 많고 공장에서 인정해주지도 않는다. 교도소 최고 기술자들이 뒤주 만드는 걸 저만치 앉아서 보고는 대뜸 하는 말이 저건 뒤주도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뒤주라는 것은 발이 저렇게 낮으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뒤주 밑으로 다듬이돌이 훌렁훌렁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문도득은 왕년 목수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집을 그렸다. 땅바닥에 나무 꼬챙이로 아무렇게나 그린 집을 보고 놀랐다. 집 그리는 순서 때문이다. 주춧돌부터 그렸다. 노인은 주춧돌부터 시작해서 지붕을 맨 나중에 그렸다. 일하는 사람은 집 그리는 순서와 집짓는 순서가 같구나. 그런데 책을 통해서 생각을 키워 온 나는 지붕부터 그리고 있구나.
비극미. 기상나팔 부는 나팔수 이야기. 나팔수는 기상 30분 전에 일어나야 한다. 교도관이 나팔수를 깨우는 방식이 무례하다. 문을 꽝꽝 차고 “야, 나팔! 일어나!” 하는 식이다. 자고 있는 사람들을 다 깨운다. 야간근무자에게 절대로 발로 차지 말라고 내가 깨우겠다고 다짐했다. 기상 한 시간 전에 일어난다. 그리고 찬 벽에 기대고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다. 조용한 한 시간이 나에겐 소중한 명상시간이다. 나팔수는 한 번도 주인공의 자리에 앉아 보지 못한 인생이다. 교도소 모든 재소자들이 수많은 민초들 중의 한포기이다. 야생초 찾아다니는 사람이 이야기한다.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를 조용히 들여다보면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누구나 꽃이다. 그 속에 시대가 있고, 사회가 있고, 기쁨과 아픔이 있다. 얼어붙은 새벽하늘을 깨고 고단한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겨울 새벽의 기상나팔은 강철로 된 소리이다. 교도소는 변방의 땅이며, 각성의 영토이다.
비와 우산. 교도소에 젊은 신입자가 들어왔다. 아침 시간, 그 친구는 치약을 갖고 있지 않았다. 옆에 있는 친구가 치약 하나 더 있으니까 쓰던 치약을 건네주었다. 그 친구 필요 없다고 딱 잘랐다. 쓰던 걸주면 기분 나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치약 구매 신청을 해서 사람들이 안 보는 데서 치약을 건넸다. 그랬더니 “필요 없다고 했잖아요!” 얼마나 민망했는지. 잘못 저지른 사람마냥 얼른 집어 넣었다. 일주일 후, “치약 아직도 있나요?” 깜짝 놀랐다. “너 치약 안 쓰는 놈 아냐?” “신 선생한테는 받아도 될 것 같습니다.” 나중에 물어봤다. “왜 나는 되고 다른 사람한테는 안되냐?” 다른 사람한테 받으면 꿀린다는 것이다. 치약 없어도 떳떳한 게 차라리 낫다는 것이다. 떳떳한 자존심이 역격을 견디는 데 큰 힘이 된다는 그의 말이 옳았다. 함께 맞는 비는 돕는다는 것이 물질적인 것이 아니고, 물질적인 경우에도 그 정이 같아야 한다는 뜻이다. 혼자 비를 맞고 가면 처량하다. 함께 비를 맞고 가면 덜 처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