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원은 선을 말한다. 위치가 있고 앞과 뒤가 있다. 2차원은 면을 말한다. 1차원 선이 움직이면 2차원 면이 된다. 선의 영역이 부드러워지며 좌우로 움직이는 형상이 2차원인 것이다. 2차원 면은 위치, 앞과 뒤, 그리고 좌, 우가 포함된다. 3차원은 가로, 세로, 높이의 3D 공간을 의미한다. 위치, 앞, 뒤, 좌, 우, 그리고 위, 아래가 포함되는 영역이 3차원이다. 2차원인 면이 움직이면 3차원이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공간이라고 할까.
4차원의 영역도 있다. 3차원의 공간에 시간이라는 영역이 포함되는 것이다. 4차원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인간은 시간이라는 영역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노인이 되면 기억에 대한 힘도 희미해지고, 현실에서도 총명함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인간 내면에는 시간을 뛰어넘으려는 그들(자신?)이 있어 4차원도 경험할 수 있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요즘 과학이 발달하여 애니메이션이나 儗似(의사)시간으로 4차원을 증명할 수 있다.
차원이 없는 0차원을 점이라고 한다. 점은 아주 작은 지점을 가리킨다. 성경에서는 일점(the smallest letter), 일획(the least of stroke of a pen)이라고 말했다. 구약에서 처음이라는 단어를 בּ(beth)라고 표현하고 있다. בּ 는 태초를 말한다. בּ 는 위, 아래, 오른쪽이 닫혀 있는 모습이다. 위가 닫혀 있으니 위에 계신 하나님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하는 지나친 논쟁을 피하라는 사상이 담겨 있다. 아래도 닫혀 있는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라는 메시지이다. 오른쪽이 닫혀 있는 것은 시작의 이전은 신의 영역이니 묻지 말라는 뜻이란다. 그 안에 점이 하나있다. 이 점은 왼쪽으로만 열려 있다. 그리고 히브리 성경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여져 있다. 히브리인들은 그들의 삶, 역사에서 열려있는 방향으로 미래를 향해서만 나아가라는 뜻이라고 믿는다고 한다.
시간의 처음은 위와 아래, 그리고 뒤 쪽이 닫혀 있는 것을 생각해 볼 수가 있다. 바로 어둠의 모습이다. 히브리 사람들은 하루의 시작을 어둠부터 시작했다. 창세기에 보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가장 어두운 시간에 가장 밝은 새벽의 빛이 비취는 것을 희망하는 모습이다.
딜런 토마스 시에 어두움에 대한 노래가 있다. “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마오. 노인들이여, 저무는 하늘에 소리치고 저항해요. 분노하고 분노해요. 사라져가는 빛에 대해.” 시간과 빛에 대한 허무가 배여 있다. 그렇지만 주어진 시간을 사용하여 버린 노인들인 인간에게 어둠에 대해 저항하고 분노하라는 메시지가 분명하다.
지난주에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았다. 아내와 함께 조조 영화를 관람하였는데 런닝 타임이 169분이나 되는 긴 영화이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영화라고 생각해 본다. 왜 어둠이어야 하는지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며 그 어둠을 향해 분노하고 소리치는 인간의 모습을 담아낸 것 같았다. 블랙홀, 웜홀, 화이트홀이라는 천체를 통해 그 해답이 5차원 공간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영화 인터스텔라이다.
5차원은 3차원공간에서 시간과 중력을 포함하는 차원이다. 다른 시간대와 공간이 동시에 공존할 수 있다는 장소이다. 이걸 이해하려면 이론으로만은 어렵고, 사랑이 해답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인간이 살 수 있는 행성을 발견하려는 노력이 영화에서 나온다. 영화에서는 중력이 지구보다 1.3배 높은 행성에서 1시간이 지구에서는 7년이 지나는 시간의 굴절도 표현하고 있다. 우주에서 보낸 주인공이 딸을 만날 때에는 자신보다 늙어 버린 머피를 만난다. 이 모든 왜곡이 시간이라는 어둠의 차원을 인간이 빠져 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의 사랑에 대한 대사가 멋지다. “사랑은 우리가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에요. 이해는 못하지만 믿어보기는 하자구요.” “사랑이야, 타스.” “우린 어쩌면 이걸 이론으로만 이해하려고 해서 오랜 시간을 쓴 건지도 몰라, 사랑이 시공을 초월하는 유일한 것이란 걸 말이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13:8) 사랑을 통해 우리는 1차원에서 시작하여 5차원까지를 넘나드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공간을 경험할 수가 있다고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