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돌베개.2015.서울.)을 읽다. 399페이지의 두꺼운 책이지만 1998년 초판에 이어 68쇄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보며 흥미를 가졌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책이 소장할만한 책이라고 말한다. 먼저 신영복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책이 나오기까지 사연이 많다. 신영복은 27세에 1968년 통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형을 받고 20년 20일을 복역하다 1988년 8월 15일에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했다. 20년간을 감옥에서 책을 읽고, 그가 생각한 것들을 가족들에게 쪽지로 편지를 쓴 내용을 모은 것이 이 책이다. 쪽지 편지를 한 장 쓰기 위해 그는 한 달 동안 머릿속에 글을 만들고, 다시 탈고를 하고 글을 암기하여서, 짧은 면회 시간에 간수가 준 필기도구로 종이에 순식간에 써 내려갔다고 한다. 감옥에서는 필기도구도 반입이 안 되고, 면회시간도 짧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자신이 감옥 안에서 생각한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 그대로 기억에서 사라지고 아무런 의미가 남지 않게 된 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는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남기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그가 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편지 한 장마다 땀의 결실인 셈이다.
이 책은 저자가 아버지, 어머니, 동생, 계수, 형수 등 가족에게 쓴 편지이다. 편지에는 한 가족의 아픔을 통하여 피어나는 애틋한 가족애를 살펴볼 수 있다. 오히려 그 아픔을 승화시키고, 서로 힘이 되는 모습을 볼 때에 건강한 가족의 모델을 보는 것 같다. 가족 중에 한 사람이 20년이란 세월을 감옥에서 지낸다는 것은 다른 가족들에겐 멍에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본문에서는 저자가 그 다른 가족들에게 새로운 에너지를 공급하는 그 무엇이 있다.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에서 나온 생각보다 죄수로서 단순한 감옥생활에서 느끼는 생각이 더 깊은 내공이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독방에 앉아서- 고독하다는 뜻은 한마디로 외롭다는 것, 즉 혼자라는 느낌이다. 이것은 하나의 느낌이다. 객관적 상황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주관적 감정의 어떤 상태를 가리킨다. 자신이 혼자임을 느끼게 되는 것은 반드시 타인이 없는 상태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자기가 자기 자신에 대하여 갖는 감정이다. 버스를 타고 있을 때나 극장에 앉아 있을 때처럼 흔히 자기의 좌우에 타인이 동석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외로움을 느낄 수 있으며, 심지어는 친구와 가족과 함께 있을 때에도 소위 고독에 젖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혼자라는 느낌, 격리감이나 소외감이란 유대감의 상실이며, 유대감과 유대의식이 없다는 것은 유대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고독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어차피 인간관계, 사화관계를 분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짧은 1년, 긴 하루- 우리는 거개가 타인의 실수에 대해서는 냉정한 반면 자신의 실수에 대하여는 무척 관대한 것이 사실입니다. 자기 자신의 실수에 있어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처지, 우여곡절, 불가피했던 여러 사정을 잘 알고 있음에 반하여 타인의 그것에 대하여는 그 처지나 실수가 있기까지의 과정 전부에 대해 무지하거나 설령 알더라도 극히 일부밖에 이해하지 못하므로 자연 너그럽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징역속의 동거는 타인을 이해하게 해줍니다. 우리는 도시의 아스팔트 위 손 시린 악수한번으로 사귀는 커피 몇 잔의 시민과는 거리가 멉니다. 우리는 오랜 시간 노력으로 모든 것을 열어놓은 자기 속으로 타인을 받아들이고 모든 것이 열려있는 타인의 내부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타인을 자신만큼 알기에 이릅니다. 우리는 타인에게서 자기와 많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남은 차이를 이해하게 됩니다. 이 차이에 대한 이해 없이 타인에 대한 이해가 충분한 것이 될 수 없으며, 그 사람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그의 경험을 자기 것으로 소화할 수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함께 맞는 비- 사람은 스스로를 도울 수 있을 뿐이며, 남을 돕는다는 것은 그 스스로를 도우는 일을 도울 수 있음에 불과한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가르친다는 것은 다만 희망을 말하는 것이다.’라는 아라공의 시구를 좋아합니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걸어가는 공감과 연대의 확인이라 생각됩니다.
죄명과 형기- 생전 처음 만나서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우리는 결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습관이 있습니다. 겉모양이나 몇 개의 소문으로 그를 온당하게 평가할 수 없음은 물론입니다. 좀 더 가까운 저리에서 함께 일하며 그리하여 깊이 있는 인식을 마련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는 까닭은 이쪽의 개인적인 조급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크게는 인간관계가 기성의 물질적 관계를 닮아버린 세속의 한 단면인지도 모릅니다. 대상을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바라보는 경우, 이 간격은 그냥 빈 공간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선입관이나 풍문 등 믿을 수 없는 것들로 채워지고, 이것들은 다시 어안렌즈가 되어 대상을 외곡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풍문이나 외형, 매스컴 등,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인식이 고의 보다는 나을지 모르나 무지보다는 못한 진실과 자아의 상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도 이곳에서 사람을 보면 먼저 죄형과 형기를 궁금해 하는 부끄러운 습관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과 진실, 본질과 진리에 대한 어설픈 자세가 아직도 이처럼 부끄러운 옷을 입혀 놓고 있는 가 봅니다.